언젠가 떠나길 바라며
[영화] 영화 <승부>를 보고, 기본기 위에 쌓이는 것들 본문

지난 주말, 몇 년을 기다린 영화 승부를 봤다. 바둑을 잘 아는 건 아니지만, 몰입감이 상당한 영화였다. 내가 특히 주목했던 건 조훈현 9단이 어린 이창호에게 강조하던 "기본기"였다. 단순한 개념 전달이 아니라, 매일같이 반복되는 정석 연습과 단수 계산처럼 지루해 보이는 과정에 대한 집요함이었다. 그런데 흥미로운 건, 영화가 단지 기본의 중요성만 말하는 건 아니었다는 점이다. 그 기본 위에서 결국엔 자기만의 스타일을 만들어야 한다는 메시지가 분명히 담겨 있었다.

이건 마치 내가 실험실에서 마주하는 현실과도 닮아 있다. 나는 비독성 양자점을 합성하고, 그걸 기반으로 발광 소자(EL 디바이스)를 개발하는 연구를 하고 있다. 처음에는 정제 조건 하나 바꾸는 것조차 겁이 났다. 수백 번의 실험을 거쳐야 겨우 패턴 하나가 눈에 들어오는 이 세계에서는, '기본'이 단순한 입문용 지식이 아니라, 수많은 실패 속에서 몸으로 체득되는 감각이자 판단 기준이 된다.
하지만 실험을 계속하다 보면 어느 순간 머릿속에서 작은 균열이 생긴다. “꼭 이렇게 안 해도 되는 거 아냐?” “이건 왜 이 조건에만 반응하지?”라는 질문들이 생긴다. 이건 누가 알려준 것도, 논문에서 베낀 것도 아니다. 내 손으로 쌓아올린 수많은 실험의 결과다. 이창호가 어느 순간부터 정석에서 벗어난 수를 두기 시작했던 것처럼, 나도 어느 시점부터는 '나만의 실험 방식'을 고민하게 되더라. 그리고 그때부터 진짜 연구가 시작되는 것 같다.
요즘은 '이 기술이 뜬다', '저 조건이면 논문이 잘 나온다'는 말들이 너무 쉽게 공유된다. 마치 정답이라도 되는 양 퍼지는 그런 정보들. 나도 처음엔 그런 것들에 흔들렸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보니, 결국 연구를 오래 끌고 가는 사람들은 눈앞의 꿀팁보다 ‘자기 방식’을 가진 이들이더라. 그 방식은 대개 기본기에서 나온다. 오히려 화려한 논문보다, 눈에 잘 띄지 않는 실험노트 하나가 더 강력한 기반이 되기도 한다.
이건 연구뿐만이 아니라 커리어 전반에도 해당되는 이야기다. 요즘엔 ‘이력서에 뭐 써야 한다’, ‘어느 자격증이 유리하다’ 같은 이야기들이 넘쳐나지만, 정작 중요한 건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의 ‘본질’을 정확히 이해하고 있느냐는 것이다. 내가 맡은 실험이 단지 결과 수치를 찍는 일이 아니라, 팀의 방향성과 연결되어 있다는 걸 알게 되는 순간부터, 그 일은 단순한 작업이 아니라 ‘나만의 기여’로 바뀐다. 그리고 바로 거기서 커리어의 방향도, 실력의 깊이도 달라진다고 믿는다.

승부는 결국 바둑 이야기만은 아니었다. 자기 손으로 쌓은 기본기 위에, 자기를 닮은 방식으로 승부를 걸 수 있는 사람이 결국 이기는 이야기. 그게 바둑판이든 실험실이든, 본질은 다르지 않았다. 그리고 어쩌면 우리 인생 대부분의 장면들도, 그렇게 자기만의 승부를 벌이는 과정이 아닐까 싶다.